혈액형 인간학

  혈액형의 진실(SBS 스페셜) / 오기현 SBS PD - 교보문고


  어느 사이에선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통하게 되었다. 무슨 가수가 손을 댔다는 이야기도 있고 영화 탓이라고도 하긴 하는데, 분명히 말해 단 3년 전만 해도 A형이 어쩌고 O형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을 일은 거의 없었다. (헌혈차 안이 아닌 한) 그런데 요새는 '역시 너는 무슨 형이야' 하는 이야기를 수두룩하게 듣곤 한다.

  그런데 그 '역시 무슨 형이다'가 맞느냐 하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나는 B형인데, 소위 'B형 남자'의 성격은 잘 들어맞지 않는다. 반면 O형 남자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을 열거해 보자. (모 블로그에 올라 있던 것인데, 거기서도 퍼온 듯이 보이고 원출처를 찾기 어려우니 그냥 전재하도록 한다)

     1.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 80%
     2. 계산적이다 - 1번과 상충하는 것 같은데... 별로 안 맞는다
     3.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다 - 70%
     4. 눈치가 빠르고 상황판단을 잘 한다 - 그다지
     5. 말수가 많이 없어 무뚝뚝하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 그대로이옵니다
     6. 꼼꼼하며 주의가 깊다 - 75%
     7. 한 사람에게 깊이 빠져들지 않고 친한 이에게도 거리를 둔다 - 꽤나
     8. 항상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려 한다 - 당연한 것 아닙니까?
     9.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지만 끈기가 없다 - 끈기는 엿바꿔 먹었답니다
    10. 항상 양보한다 - 역시 2번과 상충하는데, 한 60%

  B형 남자가 O형 성격을 보니 제법 맞아떨어진다. 그렇다면 대한적십자사가 10회에 걸쳐 혈액형을 오진했다는 것인가? 이쯤 되면 역대 적십자사 사장을 전원 구속시켜도 할 말 없을텐데.


  이처럼 반례를 따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B형인 외사촌 세 명을 두고 봐도 소위 B형남자에 맞물리는 성격은 약에 쓰려도 찾기 어려웠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초등-중학교 사이 기가 막힐 정도로 뚱뚱했던 친구들이 하나같이 AB형이었다는 건데, 통계화하기에는 너무 적은 수인지라 내세우기 어렵다. 그 외에도 무슨 자칭 쪽집게 점쟁이마냥 특성으로 지적된 사항이 모호하다든가 위에서 보듯 자기 모순이 많은 점 등의 내적인 결점, 그리고 인간 차별의 극치에 해당한다는 (참조: Political Correctness) 외적인 결점이 수도 없이 지적되는 것이 혈액형 놀이이다. 애초에 혈액의 특성은 ABO식 외에도 수도 없이 많은데도 ABO식만 그리 난리를 피우는 게 타당하지 않다든가, 세계 60억 인구를 4개 그룹으로 갈라놓는 무식무쌍함도 큰 흠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미호리 마리는 무려 부모의 혈액형까지 조합하는 방식으로 대안(?)을 마련하기도 한다. 비과학적이기는 마찬가지.) 게다가 근래 생물학의 조류에 따르면 유전자의 중요성은 과거에 비해 많이 희석된 상태에 있다. 유전 정보가 생물체의 기본을 구성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유전 정보라는 게 애초에 아미노산 서열에 불과한지라 그게 어떤 단백질로 튀어나올지는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마치 돌아갈 플랫폼이 x86인지 파워PC인지 ARM인지도 모르는 채 바이너리 코드를 해석하겠다고 나서는 꼴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혀 사리에 맞지 않음이 명백하기 이를 데 없는 '혈액형 인간학'을 정면으로 반박한 게 위의 저서이다. SBS에서 TV프로그램을 만들다가 쓰여지게 된 듯 싶은데, 다분히 흥미 위주의 기획이라고 쳐도 일본까지 원정을 다녀오는 대담함을 자랑하는 기획이다. 일본이나 한국에서는 거의 80%가 물들어 있어 전국민적인 붐이라 할 만한 혈액형 인간학은, 이에 맞춰 오히려 인간이 정형화되는 꼴을 낳는다. ('성역할 고정'에 비해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나타난다는 혈액형에 따른 성격 차이는 사실 후천적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걸 조기교육하겠다는 자들이야말로 사회를 망치는 자들이 아닐까. 일본에 혈액형별로 교육을 한다는 유치원이 있다니 그게 한국에 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게 뻔하니까. 이렇게 붐인지라 맞춰서 책을 냈는데 반대편에 서면 출판 후 반년이 지나도록 재판이 안 나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 (사실 나도 사보지는 않았다. 애초에 혈액형같은 데 구애받지 않으니까.)


  이리 반문할지도 모른다. 별자리 (Horoscope) 나 사주같은 것도 있지 않느냐고. 그런데 문제는, 별자리 따라 교육시키는 유치원 따위는 누구도 만들 생각도 안 하는데 혈액형에서는 현실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점차 증폭되는 일로에 있다. 당장 이런 무더기들을 어찌할 것인가? (1, 2, 3, 4, 5)


  유감스럽게도, 혈액형 사상은 어떤 의미로는 사회에서 뿌리뽑아야 할 보기 드문 악습에 가까워 보인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인신공격이 될 수도 있고, 사실 큰 과장이지만, 이리 말하련다.


  "세상에는 오직 한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혈액형 운운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p.s. 위에는 사실 아주 심각한 낚시가 포함되어 있는데, 나는 A형이며, 위에 언급된 'O형 성격'은 사실 AB형의 것이다. 다만 어디 가서 A형 아닌 것 같다는 소리를 제법 듣는 것을 봐서는 혈액형 운운의 반례로 그다지 손색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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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taman | 2007/02/16 03:21 | unread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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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deadline at 2007/02/16 11:49
혈액형과 바이오리듬. 지상 최대의 낚시죠. 그런데 대마초 사건도 그렇고, 기타 등등 이런 '의학적' 소견이 필요한 내용에 대해서 언론이 전문적인 '의사'에게 묻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도 꽤나 개그.(하긴 물어보면, 장난하냐는 대답이 돌아오긴 하겠다만.) 뭐, 유료 사이트인 Pubmed에서 자료 검색하면 관련된 논문 한두개쯤 나오긴 하겠습니다만, 언론도 요새 가난한 모양입니다.
Commented by 어부 at 2007/02/16 17:57
혈액형과 성격이요? 상관 없습니다.
Commented by NOT DiGITA at 2007/02/17 00:51
볼 때마다 어이없죠. 아니, 재미로 보는 거야 별 생각없지만 저걸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대해서 대략 난감입니다. -_-

NOT DiGITAL
Commented by Dataman at 2007/02/17 02:16
d님/
저런 건 돈을 벌기 위해 단행본을 내야 하는 겁니다. (풉)

ㅇ님, N님/
푸념밖에 못하는 게 유감이지만요.
Commented by 파란거북 at 2007/02/17 10:45
사람을 4가지 성질로 나눈다는것 자체가 사실 웃기긴 하죠. (여자친구가 강력히 주장하는 바이기도 합니다만.... 아닌게 아니라 그녀의 경우 통용되는 혈액형 성질이 잘 맞지 않지요.)

이미 일본에서조차 20년 전쯤에 구라라는 소리가 나왔다는 사실을 과연 '대한민국' 국민들은 알까요?
Commented by 다문제일 at 2007/02/19 19:25
그 SBS 다큐멘터리 봤습니다. '혈액형 인간학'을 비웃게 된 지 꽤나 되었으면서도 막상 '제이리그 선수를 대상으로 통계를 내보니 포지션마다 강세를 보이는 혈액형이 있다더라' 하는 따위 기존의 혈액 신앙을 뒷받침하는 듯한 예시를 볼 때는 살짝 흥분하게 되더군요. 그러다가 허무하게 진실이 드러나는 대목에서는 실망 비슷한 것을 느끼는 모습이라니 사람의 마음이란 게 정말 미묘한 것이긴 합니다. 이러니 4종 분류가 더욱 허망한 것일지도.

얼마 전에 연예인 자살 문제로 100분 토론을 하던데 잘 보고 있다가 현진영이 "제가 A형이거든요. 그래서 소심하고..." 하는 소리 듣고 틀어버렸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신 내세 귀신 외계인 예언 역술 풍수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더군요. 이러다가 정통 회의주의자처럼 한의학도 부정하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양자역학을 공부할 수도 없고 앞으로 뭘 믿고 살아야 할 지... 그나마 음모론 한두 개 믿는 것이 있는 게 다행이랄까요. ㅎ
Commented by Dataman at 2007/02/20 01:41
ㄷ님/
일본에서 문제가 되는 게,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게 주입이 되다 보니 정말로 A형은 소심하게 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한국도 그런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데, 대체 인구의 40%를 소심한 인간들로 채워서 어떻게 살려는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한의학은 그다지 체계적이지는 않은데, 사상의학은 혈액형 인간학과 유사한 면이 있죠.
Commented by 마근엄 at 2007/02/23 08:57
영화 달콤 살벌한 그녀를 보면 남자 주인공이 별자리가 어쩌구 혈액형이 어쩌구하는 여자에 질색하지요. (그래서인지 나이 다 차도록 연애 경험없는 주인공) 모처럼 사귀게 된 여자 입에서 혈액형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변하더니 소리를 버럭 지르며

[혈액형별 성격이란 것은 말이죠, 2차대전때 독일 나치가 인종차별의 근거로 삼기위한 우생학에서 나온 것데 그걸 일본의사가 일본으로 가져온 것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왔죠. 정작 원래 나라에서는 이미 수 십년 전에 폐기된 거라구요. 지금 전 세계에서 혈액형 운운하는 나라는 일본하고 우리나라밖에 없단 말입니다 !]
Commented by Dataman at 2007/02/24 16:59
ㅁ님/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런 데 맞장구 쳐주지 않으면 연애시장의 패자가 될 듯한 분위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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